
역사적인 배경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이후 독립군의 활동 무대가 만주로 옮겨가던 시기에 벌어진, 첫 대규모 무장 독립 전투로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은 현실 속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무장으로도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시기였고, 독립군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싸움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가 제각각 움직이고 있었다. 대한독립군을 비롯해 서로군정서, 국민회군 등 각 조직이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에서는 이 부대들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 힘을 모아 다같이 한 팀이 되는 연합 전선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조직이 한 목표를 위해 하나로 움직였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1920년 6월 초, 일본군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 거점을 없애기 위해 본격적인 추격 작전을 벌였다. 독립군은 정면으로 맞붙기보다는, 먼저 봉오동 일대 지형을 꼼꼼히 살피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일본군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을 준비했다. 싸움을 단순히 운에 맡긴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자리를 미리 파악하고 유리한 흐름을 만들어 놓고 싸운 전투였던 것이다.
매복작전
봉오동 전투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술 중 하나는 바로 매복작전입니다. 독립군은 사전에 지형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일본군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여 최적의 매복 지점을 선정했습니다. 봉오동은 골짜기와 능선이 많아 매복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형적 특성을 아주 잘 활용한 전략이 봉오동 전투의 핵심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주를 이뤄 한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 인원을 미끼로 활용하며 의도적으로 후퇴하는 척 연기를 합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였지만 미끼가 된 독립군은 일본군이 그들을 추격하도록 연기하고 그에 속아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 깊숙이 들어오자, 사전에 배치된 독립군들이 사방에서 매복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에게 큰 혼란을 주었고, 상황은 순식간에 독립군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또한 독립군은 일시에 공격하지 않고, 파도처럼 연속적인 공격을 퍼부음으로써 일본군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매복작전은 단순히 숫자로 불리한 독립군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전략이었고, 이후 독립군 전술에 있어 교과서적인 사례로 평가받게 됩니다.
전투방식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정면승부를 피하고, 유격전 방식으로 싸운 대표적인 전투다. 당시 독립군은 병력이나 무기에서 일본군에 비해 크게 불리했지만, 그 약점을 억지로 메우려 하지 않고 지형과 기동성을 무기로 삼아 판을 뒤집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준비는 치밀했다. 독립군은 인근 주민들과 힘을 모아 정찰을 하고, 식량을 마련하는 등 뒤를 받쳐줄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병력을 한곳에 몰아넣기보다는 여러 곳으로 나눠 고지대나 숲속에 숨겨두고, 일본군이 안으로 들어오면 기습을 가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설계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그 방식은 그대로 위력을 드러냈다. 독립군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움직임도 빨랐다. 공격을 한 뒤에는 오래 버티지 않고 바로 빠지거나, 다른 매복 지점으로 재빨리 옮겨 피해를 최소화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예측하기 어렵고, 대응하는 사이 또 다른 곳에서 타격을 받는 상황이 반복된 셈이다.
일본군에게 이런 전투 방식은 큰 충격을 줬다. 단순히 독립군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전략적으로 싸운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오동 전투는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니라, 준비성과 판단력, 적절한 타이밍에 움직임이 잘 맞물린 ‘전술의 승리’로 평가 받는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운동의 한 장면으로만 남는 사건이 아니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끝까지 방법을 찾아 성공하고, 사람들과 도와가며, 슬기롭게 싸워 이겨낸 역사적 경험이다. 현재 우리가 이 봉오동 전투를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날짜와 전투의 결과만 외우는 데서 끝나면 안됩니다. 그들의 정신과 선택의 의미를 우리 마음 속에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이 알고 배울 수 있도록 계속 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